[문장수집]집단 착각 : 인간 본능이 빚어낸 집단사고의 오류와 광기에 대하여 토드 로즈(Todd Rose) 21세기북스(Book21 Publishing Group)

2024. 6. 11. 02:44서초사는 이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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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착각

인간 본능이 빚어낸 집단사고의 오류와 광기에 대하여

 

출판사 : 21세기북스(Book21 Publishing Group)

저자 : 토드 로즈(Todd Rose)

교육신경과학 분야의 선도적인 사상가로서, 하버드교육대학원에서 지성·두뇌·교육 Mind, Brain, and Education 프로그램과 개개인학 연구소를 맡아 이끌고 있다. 위스 생체모방공학 연구소에서 부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중학교 ADHD 장애 판정을 받은 성적 미달로 고등학교를 중퇴했으나 이후 대학입학자격검정시험 GED을통과해 지역대학에 입학했다. 야간 수업을 들으며 주경야독한 끝에 하버드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인간발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하버드-스미소니언 천체물리학 연구소에서 박사 후 연수과정을 마쳤다. 비영리단체인 개개인의 기회연구소기회연구소 Center for Individual Opportunity 공동 설립했고, 구글, 애플, TedX, SXSW(창조산업 박람회), 아스펜 아이디어 페스티벌 다양한 곳에서 강연을 펼치고 있다. 비영리 단체인 포퓰리스Populace의 공동 설립자로서, 모든 사람이 충족감 있는 삶을 살아갈 기회를 누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가 배우고 일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혁신을 일으키기 위한 활동에 매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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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수집]

 

우리는 현실보다 상상에 의해 더 자주 고통받는다. -세네카

 

만약 집닥 착각이 그저 동화 속의 일이라면 그 현상은 중요할리 없을 것이며 나는 이 책을 쓸 필요도 없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집단 착각은 보편적으로 발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더 위험하게 변하는 중이다.

 

성공적인 인생이란 무엇일까? 여러분은 다음 중 무엇을 정답이라 택할 것인가?

A. 본인의 관심과 재능에 따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룰 때 성공적인 삶을 산 것이다.

B. 부자가 되고 사회적으로 높은 커리어를 쌓거나 유명인사가 될 때 성공한 것이다.

여러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을 답이라 택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는 A를 답이라 생각하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B를 택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집단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결과를 보니 응답자 중 97퍼센트는 A가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92퍼센트는 대다수가 B를 답으로 택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우리 연구진은 사회적 압력의 영향을 벗겨내고 진정한 마음속 의사와 우선순위를 드러낼 수 있는 방법론을 적용해 보았다. 그러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격, 인간관계, 교육처럼 삶의 질과 밀접한 요소를 성공의 가장 중요한 척도로 여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바로 그 사람들이 남을 바라볼 때는 달랐다. 다른 사람들은 부나 지위, 권력 같은 경쟁적 요소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믿었다. 별 한심한 실험도 다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집단 착각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보다 잘 보여주는 실험도 드물다.

 

다른 이들과 행동을 조율하고 싶은 충동, 사회학자들이 흔히 '순응 편향 Conformity Bias'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각인된 생물학적 본능이다.

 

코로나19로 인해 화장실 휴지가 남아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그러한 믿음에 실질적인 근거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러한 믿음에 따른 결과만큼은 현실화될 수 있다.

 

우리에게 내재된 순응 편향으로 인해, 우리는 일상적으로 크고 작은 집단 착각과 연루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가은 집단 착각 속에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실감하지 못한다. 다른 이들을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내적인 충동이 너무도 강렬한 탓에 우리는 개인으로서 지녀야 할 판단력을 내팽개치는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만 가지고 있다면 그때는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을 해낼 수 있다. 소셜 미디어로 인해 기존의 관점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관계로, 열혈 추종자를 통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다수의 의견을 만들어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지금 벌어지는 이 상황에 대해 우리 모두는 책임이 있다. 나쁜 소식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다. 그 말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집단적이든 개인적이든, 우리 모두가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집단 착각은 결국 거짓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 개개인의 노력으로 거짓을 밝혀낼 수 있다는 점은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소식일 것이다. 올바른 도구를 손에 들고 현명하게 휘두른다면 우리는 집단 착각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세네카는 스토아주의 철학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스토아주의는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채 감정을 억누르는 철학이라고 폄하되곤 한다. 하지만 세네카가 말한 스토아주의는 훨씬 풍부하고,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훨씬 실용적인 철학이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다들 그렇듯 세네카는 우리의 고통을 해결할 방법이 외부 세계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만족스러우누 삶을 추구한 다면 감정을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 대신 그러한 감정에 대해 인격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세네카는 이러한 작업을 '자아 형성'이라 불렀다.)

 

세네카는 공포, 원한, 질투, 욕망, 그밖에 다른 감정들이 솟구쳐 올라와 자기 파괴로 향할 때, 그것들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런 감정들로 인해 스스로 망가지고 여러 사람들을 해쳤던 로마 황제들을 목격했기에 내놓을 수 있던 통찰이었다. 세네카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실용적인 지식과 단순한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건 실천 가능한 감정 통제의 방법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한 방법을 따를 경우 정념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고 세네카는 주장했다.

 

스스로의 잘못을 부드럽게 위한 방법도 있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대신, 하루가 끝났을 때 침대에 누워 분노나 공포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던 순간을 차분하게 되짚어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용서하면서 그 순간 본인의 감정이 격발 된 이유를 되짚어보게 되고, 다음에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거의 2천 년 전의 조언이지만 세네카의 말은 여전히 유용하다. 실은 나는 세네카의 조언이야말로 우리가 집단 착각과 집단 순응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사회적 본능은 생물학적인 것이지만, 사회적 본능에 대한 대응은 우리 스스로가 통제할 수 있다. 올바른 지식과 기술로 무장하고 있다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거나 겁쟁이처럼 숨는 극단적 선택 사이에서 양자택일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의 목적은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집단에 순응하는지, 그러한 순응이 어떻게 집단 착각을 낳는지 이해하고, 사회적 영향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완전히 파악하여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영국의 재무장관이었던 데니스 힐리가 남긴 명언이다. "구멍에 빠져 있다면, 삽질을 멈춰라." 우리 사회가 하는 짓이 바로 그렇다. 서로에 대한 체계적인 오해를 간직한 채 삽을 들고 스스로를 더 깊은 구멍으로 몰아넣는 중이다.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다른 이들과 함께하고, 침묵을 지키고, 다른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스스로의 신념을 배신하고 억누르라는 엄청난 압력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맹목적인 순응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갈 뿐 아니라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우리의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

 

다른 이들의 행동을 자신의 행동 기준으로 삼는 것은 생존의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시간의 압박을 받고 있거나 불확실하고 모호한 상황일 때라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세상을 둘러보고 힌트를 얻어서 부족한 정보를 채워 넣는 방식은 그럭저럭 잘 작동한다.

 

집단에 속하는 개인들이 개인으로서 판단을 내려야 집단 지성이 올바르게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다른 이의 선택을 볼 수 있을 때, 그래서 다른 사람의 선택을 보고 흉내 낼 수 있을 때, 집단 지성은 순식간에 '집단 무지성'으로 전락하고 만다.

 

모방의 연쇄 Copying Cascade는 소름 끼칠 정도로 쉬운 일이다. 경제학자 아비짓 바너지가 개발한 모델에 따르면 연쇄 반응의 가장 앞에 있는 이는 언제나 뭐가 됐건 자신의 개인적 생각을 따르고, 두 번째 사람도 그렇게 행동한다. 하지만 세 번째 사람까지 오면 앞에서 보인 행동을 고스란히 따라 하는 경향을 크게 드러낸다. 특히 앞의 두 사람이 똑같은 행동을 했다면 더욱 그렇다. 바네르지가 관찰한 바, 자신들보다 앞서 어떤 행동을 하는 걸 목격한 이들이라면 스스로의 개인적 판단을 미뤄두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배우자가 사망하면 오래 지나지 않아 남은 사람도 사망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이른바 '미망인 효과 Widower Effect'라는 오래된 개념을 발견했다. 크리스타키스는 추가 연구를 깊게 파고들어 간 끝에, 사람의 감정과 행동은 실제로 강호 결부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 비슷한 집단으로 묶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마디로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라는 질문의 형식이 나쁘다고 지적한다. 사실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면 공격적으로 받아들일 사람들이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과 선호를 두고 그 이유에 대해 남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사실은 좋아한다.

 

실제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마치 돈이나 음식 등 객관적인 보상을 얻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만족을 느낀다. 그러니 다양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올라오는 내용 중 사람들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경험을 담은 것이 무려 80퍼센트에 달하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두뇌에는 실제로 개인적 정보를 노출하고자 하는 신경 회로가 자리 잡고 있다. 사생활과 개인적인 정보를 한 조각씩 노출할 때마다 우리의 뇌에서는 보상 기제가 작동하면서 우리의 몸에 순수한 기쁨을 안겨준다. 말하자면 우리는 불안하거나 긴장해서 속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는 게 아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속마음을 꺼내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비슷한 믿음을 지니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18세기의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정신적 조화'를 찾고자 한다.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 집닥적 정체성이 강화되고, 신뢰, 협조, 평등, 생산성이 튼튼해진다. 소속 집단과 현실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공통의 관점을 형성할 뿐 아니라 비슷한 감정 및 세계관까지 갖게 된다. 이는 우리의 핵심적인 가치관을 함양하며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우리의 삶에 의미가 부여되며 자기 존중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거절에 대한 우리의 내적 감각은 너무도 예민하게 발달해 있는 나머지, 심지어 그 일이 멀리 떨어져 있거나 작위적인 상황이라는 걸 분명히 아는 경우에도 고통을 느낀다. 인터넷에서 무시당하거나 배제당하는 기분, 즉 사이버 도편추방은 사람을 만나서 거절당하는 일보다 훨씬 더 쉽게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물리적, 감정적 반응은 거의 유사하다. 문제는 우리가 '좋아요'가 낳는 즉각적인 만족의 세상 속에서 수천여 명의 가상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무시당하는 기분을 느끼기가 너무도 쉬운 세상이 되었다. 가령 누군가가 쓴 게시물에 댓글을 달아놓고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지만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사소한 경우를 떠올려 보자. 사이버 도편추방을 당하는 사람은 귀중한 소속삼이나 자기 존중감의 상실을 겪게 된다. 사회적 단절에 대한 우리의 생물학적 반응은 연결을 추구하는 우리의 기술적 발전에 덜미를 잡힌 듯하다.

 

거절의 크기나 강도가 얼마나 큰지는 상관없다. 일단 거절당했다는 사실이 인식되고 스위치가 켜지고 나면, 우리에게 내재된 도편추방 경고등은 가장 큰 소리로 쩌렁쩌렁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심지어 사회적 거절이 아주 미세하게 벌어질 때조차 생명이 위협당할 때와 맞먹는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나의 개인적 가치가 나의 부족과 충돌할 때 우리는 세 가지의 선택지와 마주하게 된다. 쫓겨날 각오를 하고 집단에 도전하거나, 제 발로 떠나거나. 혹은 세 번째 선택지를 고려해 볼 수 있다. 그저 집단이 원하는 바에 항복해 버리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믿음과 행동이 상응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균형을 잃은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는 이러한 현상을 '인지 부조화 Cognitive Dissonance'라 불렀다. 인지 부조화는 불쾌한 상황이기에 믿음과 행동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동기가 생긴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바꾸거나 정당화할 수 있는데, 대체로는 후자의 길을 택한다.

 

우리의 개인적 믿음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 발생하는 첫 번째 위험이 바로 이것이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의 거짓말을 믿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상황은 더 악화될 수도 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때 다른 이들이 그걸 알아챌지 모른다는 찝찝한 기분이 느끼기 때문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이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몰라도 우리는 그런 기분을 느낀다. 이러한 현상의 연구에 있어서 선구자 격인 코넬 대학의 심리학자 토머스 길로비치는 이것을 '투명성의 환성 Illusion Of Transparence'이라 부른다. 이런 환상으로 인해 우리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 스스로를 끔찍하게 거짓말을 못하는 거짓말쟁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심리학자 마릴린 브루어와 그 동료인 캐슬린 피어스는 이렇게 예견한 바 있다. "개인이나 사회적 조직은 심리적, 경제적, 정치적 손실을 입을 것이 우려되는 상황"에 놓이면, 불확실성을 줄여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에 쫓기게 된다. 그리하여 전에 비해 더욱 외부를 배척하고, 세계를 단순하게 바라볼 수 있게끔 해주는 단순한 범주로 이루어진 사회적 정체성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려 들 것이다. 그로 인해 차별은 더욱 강화되며 변화에 대한 저항도 커진다.

 

정체성의 함정에 빠지고 싶지 않다면 자기 정체성의 복잡도를 높여야 한다. 말하자면, 마치 컬트 조직에 빠진 이들이 그렇듯 하나의 집단에 모든 것을 쏟아붓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집단에 속함으로써 정체성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즉 사회적 정체성의 포트폴리오를 건강하게 다각화하는 것이다. 이때 어떤 집단에 애착을 느끼고 소속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름의 긍정적 면모를 지니고 본인에게 끌리는 면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정체성 다각화의 혜택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2000년대 초, 소나이 로카스와 마릴린 브루어는 다양한 부족에 속할 때 발생하는 또 다른 효과를 발견했다. 누군가가 다양한 집단에 속해 있다고 생각할수록 그는 더욱 큰 회복탄력성, 관용도, 포용력을 지니게 된다. 또한 이는 그 사람의 전체적인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집단에 속하는 이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더욱 폭넓은 정보를 제공하며, 균형 잡힌 관점을 통해 단일한 집단이 품고 있는 환성에 빠질 가능성을 줄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사회적 정체성의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값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정체성 복잡도를 높이는 것은 우리가 속한 집단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마치 다양한 미생물과 접촉함으로써 면역력을 높이듯, 우리가 속하는 집단 역시 변화를 받아들일 때에만 생존하고 번창할 수 있다.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생각의 다양성을 늘리는 것은 우리 모두를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밴드웨건 현상 : 어떠한 선택이 대중적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정보를 인식하면, 그 선택이 옳다고 믿는 경향

노엘-노이만은 밴드웨건 현상이라는 용어를 창안하고 현실에 적용한 최초의 학자다. 특히 정치에서, 실제로 이런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침묵을 택한다.

실제로 우리는 스스로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주, 불편한 침묵을 택한다.

 

침묵은 실질적인 해를 끼친다. 그것도 다양한 방면에서 해를 끼친다. 단기적으로 볼 때 침묵의 거짓말은 우리 스스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또한 침묵은 우리가 속한 집단을 새롭고 중요한 정보로부터 차단하며, 어쩌면 우리와 다른 이들에게 부지불식간에 해를 끼치고 있었을지 모르는 기존의 정설을 강화하고 만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의 침묵은 집단 착각을 만들고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집단 침묵은 어딘가에 분명한 피해를 낳고 있다. 그런 폭력의 직접적 피해자만 피해를 입는 게 아니다. 목격하면서도 가만히 있는 모든 이들이 상처를 받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다면 사회 전체가 피해자가 된다. 우리가 침묵함으로써 나쁜 행동에 대해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꼴이 되니 말이다. 사람은 서로의 행동을 모방한다. 그러니 이런 행동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수밖에 없다. '다들' 같은 행동을 하거나 같은 행동을 보며 침묵한다면, 우리는 그런 나쁜 행동이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것인 양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주 아득한 옛날부터 그랬다.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이들은 사람들을 통제하고 침묵을 강요하기 위해 압박과 위협을 가해 왔다. 하지만 오늘날은 소셜 미디어의 출현으로 인해 이 공식이 달라졌다. 정보가 민주화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막강한 무기가 출현한 것이다. 그 새로운 무기는 많은 경우 더욱 믿을 수 없을뿐더러, 과거의 무기에 비해 보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하비 와인스틴 같은 성착취자를 가로막기 위해 SNS를 통해 미투 운동이 벌어지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공공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하지만 마치 과거에 권력을 지닌 남성들이 그 힘과 권위를 이용하여 사회에 해를 끼쳤듯이,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는 집단 괴롭힘을 확산시키고 있다. 손가락을 몇 번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안의 일면만 보고 순간적으로 판단하며 사람을 다면적인 인격체로 취급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댓글 몇 개, 사진 몇 장, 혹은 몇 개의 비디오 클립뿐이다. 그들의 인격 전체가 알록달록하게 상투적인 방식으로 꾸며진 채 작은 상자에 담겨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타인에 대해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을 갖게 되고, 그들이 실제로는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온라인에서 타인을 비난하고 몰아가는 이들은 사이버 세상의 그늘에 숨어 희생자들을 우롱하고 무력화하고 마는 결과가 이어진다.

 

의혹의 씨앗을 심을 때는 진실한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본인이 믿지 않거나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반대 의견을 집단 앞에 제시하는 것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의 정직한 견해를 드러내도록 돕는 것이 핵심이다. 모든 훌륭한 토론 참여자가 그렇듯, 우리는 반대 견해에 뭔가 긍정적인 면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다수 견해에 그 어떤 바람직한 면도 없지만 해당 주제가 본인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왜 내가 기꺼이 발언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신체적 경제적 탄압을 받을까 우려된다면 익명으로 의견을 제시할 방법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는 그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다면 같은 생각을 지닌 이들을 규합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침묵하게 된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고, 자신의 행동 동기가 무엇인지 민감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지라르는 인류의 역사 전체를 놓고 이러한 경쟁 본능을 고찰했다. 그가 볼 때 경쟁을 향한 본능은 그저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원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촉발되는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사회적 본능으로 인해 다른 이를 모방하고 유대감을 느끼며 다른 이들과 스스로를 비교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믿음이나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 맞춰 스스로를 교정해 나가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뇌에는 도파민과 옥시토신이 쏟아지는 것이다. 가령 페이스북의 '좋아요'기능이나 다른 소셜 미디어들은 이런 보상 기제를 활용한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좋아요' 숫자를 헤어리며 따봉을 받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우리는 모두 도파민 중독자인 셈이다.

 

반면 우리가 상대적으로 열등하다고 느낄 때 우리의 두뇌는 우리를 물리적 고통으로부터 보호할 때와 똑같은 성분의 마약성화학 물질을 분비한다. 여기서 우리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자칫하면 어둠에 잡아먹힐 수도 있는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상대적으로 나은 기분을 느끼고자 다른 이들을 끌어내리거나 심지어 상처 입히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사실이라 믿으면 그것이 곧 현실이 된다.

 

한마디로 '글러먹은' 자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소리다. 정중한 식사 예법은 왕정 시대만큼이나 오늘날까지도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이며 특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핵심적 요소로 남아 있는 것이다.

 

벌레가 잔뜩 파먹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라거나, 길가에서 똥을 누고 있는 사람을 목격했다면? 놀랍게도 우리 몸의 반응은 동일한다. 구체적으로 역겨운 장면을 보았을 때와 누군가 새치기하는 장면을 봤을 때, 우리의 뇌는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반응한다. 혐오 Revulsion는 자연적인 반응이다. 자신을 해로운 것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우리의 뇌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명령인 것이다. 그러니 역겹다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규법 준수에는 뇌도 Insula라는 부위가 할당되어 있는데, 규범의 위반을 발견하면 우리는 그 느낌을 역겨움으로 인지하게 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대체로 무시당하는 사람들, 즉 예술가들이 지니는 엄청난 중요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 앞에서 우리는 일상을 멈추고 생각하게 된다. 대부분의 위대한 예술은 규범을 다시 숙고하게 만들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게끔 청중을 일깨운다. 이고를 스트라빈스키의 <불의 제전>,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에우리피데스부터 바츨라프 하벨까지 이어지는 위대한 시인들의 희곡을 떠올려 보자. 이 영원불멸한 예술작품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금 우리가 허우적대고 있는 규범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예술 앞에서 우리가 벌이는 인간적인 어리석음을 깨닫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예술이 우리를 어리석음의 선잠에서 깨워줄 때도 있다. 우리 스스로의 위선과 유해함을 폭로하는 예술 때문에 불편한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예술의 본질이다.

 

가령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사회적 규범이 흔들릴 때 벌어지는 모습들을 정교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가 쓴 희극들은 대체로 사회적 혼동의 접점에서 벌어진다. 우리가 서로를 잘못 이해하고 엉뚱하게 받아들일 때 벌어질 수 있는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오해하고 여자도 남자를 오해한다. 서로 다른 계급을 지닌 사람들의 위치가 뒤바뀐다. 가장 훌륭한 예술은 그렇듯 우리에게 주어진 규범에 질문을 던지게 할 뿐 아니라 그중 가장 나쁜 것을 파괴한다. 그런 파괴가 예술의 영역에서는 정당하다. 그렇게 인식이 바뀌고 우리는 결국 더 좋은 사회에 살 수 있게 된다.

 

사람의 마음을 올바로 읽어내는 일은 어렵다. 심지어 오래도록 알아온 사이에서조차 그렇다. 마치 우리 스스로가 그렇듯, 다른 사람들 역시 사회적 영향을 받아 스스로의 행동을 바꾸어 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문제는 상대방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실할 방법이 도무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 및 우리가 이미 가진 지식을 바탕으로 추측하는 것만 가능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관계로 오직 불완전한 정보에 바탕을 둔 추측만 할 수 있다. 

 

인간 두뇌의 시각 정보 처리 속도는 느리다.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우리가 모두 처리해 낼 수 있다는 주장은 그저 우스꽝스러운 소리일 뿐이다. 그 결과 우리는 알고리즘을 통해 개인화되고 재단된 정보만을 제공받는 세상에 살 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제는 우리가 '보고 싶은' 정보만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는 정말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전문가인지 여부는 아랑곳없이, 가장 큰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증폭시켜 줌으로써 불난 데 기름을 붓는다. 예컨대 트위터 미국 사용자의 경우, 소수의 사용자들이 대다수의 트윗을 작성했다. 2018년 현재 전체 트윗의 80퍼센트가 고작 10퍼센트의 사용자에 의해 작성되었던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된 소수의 목소리는 그리하여 그들이 다수를 대변하고 있다는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이런 전략은 먹히는 전략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포기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앨리스 워커

 

삶의 특권은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있다. -칼 구스타프 융

 

끔찍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은 무슨 짓이든 합리화할 수 있는 법이다.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며 화합하고 있는 상태를 '조화 Con-gruent'라 칭했다. 그러니 부조화란 누군가의 내면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다. 부조화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하며 결국 부정직한 자아상을 유지하게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실제로 인지 부조화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압박한다. 그래야 내면에서 부대끼는 감정을 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느낌 혹은 소망과 충돌할 때, 믿음과 행동 사이에서 내적 전투가 벌어진다. 게다가 자신의 가치와 반하는 일을 했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해도 되는 일이 무엇인지 기준을 바꿔버린다. 그런 일은 또한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 우리는 내면의 기준선이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가치관을 이쪽으로 혹은 저쪽으로 슬쩍 옮겨놓음으로써 불편한 상황을 해결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베이글 가게의 짧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나는 근처에 있던 서점의 자기 계발 서적 코너를 둘러보았다. 내가 서가에서 꺼내든 책의 제목은 심리학자 나다니엘 브랜든 Nathaniel Branden이 쓴 <자존감의 여섯 기둥 The Six Pliiars Of Self-Esteem>이었다. 흥미롭게 보였지만 그 책을 살 돈도 없었던 나는 서점에 앉아 곧장 다 읽어버렸다. 브랜든에 따르면 자존감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의 마음을 믿고 본인이 행복할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었다.

 

책에 담긴 몇몇 구절은 내 뇌를 강타했다. "자존감은 내밀한 경험이다. 인간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가가 중요하다." 브랜든의 글을 계속 됐다. "자존감의 궁극적인 근원은 오직 내면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이 아닌 나 자신의 행위에서 나온다. 자존감을 외적인 것에서,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스스로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자존감을 망가뜨리는지, 그리하여 스스로를 더 큰 위험에 노출시키고 마는지, 나는 아주 힘든 길을 돌아서 배웠던 셈이다.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들은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이 습관은 놀라울 정도로 큰 치유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순응하고 있던 것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어디에서 좌절하는지, 무엇에 대해 어떻게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규명해 나갔다.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나는 스스로를 이해하면서 조용한 평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나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 내적 조화를 갖추는 것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조화로운 사람이란 개방적이고 신실하며 타인을 수용하고 공감할 줄 알며 진실된 사람이라고 칼 로저스는 주장한다.

 

본인의 개인적 가치에 따라 조화롭게 살고 있는 사람은 인생에서 더 큰 만족감을 누린다. 더 행복해진다.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자기 확신이 점진적으로 늘어날 때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주는 가중치는 세배씩 줄어든다. 말하자면 우리가 지닌 기술이 늘어나고 숙달됨에 따라 우리는 다른 사람을 덜 모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피드백에 덜 민감해지고, 우리의 자존감이 자람에 따라 우리의 전반적인 건강과 행복 역시 증진된다. 이는 우리의 심리학적 면역 체계를 강화함으로써 역경 앞에서 더욱 큰 회복탄력성을 지니게 할 뿐 아니라 우울, 불안, 섭식 장애에 빠져들 위험을 줄여준다.

 

인격적 조화는 신성한 가치를 지닌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순응 편향에 맞서기 위하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정직함, 고결함, 관대함, 공감, 그 외에도 우리가 진심으로 믿고 있는 인격적 미덕은 사회적 규범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한 가치를 통해 우리는 상황과 조건을 뛰어넘어 우리 자신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 규정짓는다. 우리가 그러한 가치를 깊숙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남들 또한 그런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 아닌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 스스로가 그 가치를 믿기 때문에 믿는다.

 

결국 우리는 순수하게 경제적이거나 공리주의적인 존재가 아니다. 심지어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있을 때조차 내면의 조화를 추구한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는 경향이 있다. 공동체 생활에 기반을 둔 뇌신경 화학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또한 다른 이에게 진실하도록 유도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거짓말을 할 때보다 진실할 때 기분 좋도록 만들어진 존재다.

 

서구권의 문화 속에서 누군가 진실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가 '겉치레, 기만,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이는 윤리적 삶의 절대적 중심에 놓이는 가치로 그 기원은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진실성은 '깨끗하다, 건강하다, 순수하다'는 뜻을 지니는 라틴어 sincerus에서 파생된 단어다. 고대인들은 위조되거나 수선했거나 불순물이 섞이거나 하지 않은 물건을 두고 그 단어를 사용했다. 

 

이제 우리는 진실성 대신 도덕적인 느낌이 덜한 '진정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거짓과 반대되는 의미로 진짜라는 의미를 지니는 단어다. 진정성은 좋은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속에는 윤리적 실천의 요구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비즈니스 업계에서 칭송받는 진정성 있는 리더란 성실하고, 자기 절제력을 갖추고 있으며, 자기 인식이 있고, 가치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데 진정성은 미덕과 상관이 없다. 진정성 있는 사람은 진정성 있게 선한 인물일 수도 악한 인물일 수도 있으며, 좋은 가치를 추구할 수 있지만 나쁜 가치를 추구할 수도 있다.

 

사적인 자아와 공적인 자아를 정렬하는 일은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 조화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헌신할 때,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는 이들은 집단 착각을 만들고 키워나가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 집단 착각에 빠져 있는 다른 사람들이 탈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신뢰는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근본적으로 신뢰란 다른 사람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맡은 바 역할을 제대로 해낼 것이며 그들이 우리에게 지니고 있는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기본적으로 가정하는 것, 그것이 신뢰다. 또한 신뢰에는 공유된 현실에 대한 내재적이고 암묵적인 인정이 반영되어 있다.

 

우리 인류의 대다수는 스스로를 정직하고 도덕적이며 이타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있을 때조차 마찬가지다.

 

사람들 전체를 놓고 보자면 그들은 믿을만한 것이 맞다. 다만 우리는 사람들이 믿음직하지 않다는 집단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우리는 뭐가 잘못됐는지 알게 되었다. 착각으로 만들어진 불신의 뿌리가 드러났다. 그런데 우리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버릇을 들인 지 오래되었다. 타닌이 믿을만한 존재라고 입증된 전까지는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 것이 기본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무죄를 증명하기 전까지는 유죄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추측하는 바는 본질적으로 근거가 부족한 셈이다.

 

'고신뢰자'들은 '저신뢰자'들에 비해 남의 거짓말을 더 잘 잡아내고 있었다. 저신뢰자들은 모든 이를 의심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고신뢰자들은 타인에 대해 내린 판단과 신뢰는 현실에서 검증받게 된다. 그렇게 쌓인 경험으로 인해 고신뢰자들은 거짓말을 알아채는 지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신뢰가 관건이다. 폴 작과 다른 이들이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가장 높은 수준의 신뢰를 부여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 일수록 더욱 행복하고, 생산적이며, 회사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고신뢰 회사를 일터로 삼고 있는 피용자들은 사용자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그에 부응하는 경향을 보였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 동료들과의 친밀함 등에서도 고신뢰 회사의 종업원들이 앞서는 모습을 보였다.

 

다른 사람을 모방하기 때문이든, 피해자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져서든,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이 침묵하고 있어서든 부조화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고 그 상처는 오래 지속된다. 평온한 삶은 훼손되고, 우리의 잠재력을 완전히 구현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지고 만다.

 

역설적이게도 순응할수록 우리가 속한 집단은 피해를 본다. 우리가 침묵에 빠지면 집단의 개선과 성장에 필수적인 것들을 제대로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 신뢰, 정직함, 새로운 관점 등이 무시당하고, 억압되며, 처벌받거나, 단박에 부정당할 때, 진보는 멈추고 만다. 그렇게 만들어진 집단 착각으로 인해 집단의 구성원들은 더 성장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그렇게 집단 착각에 굴복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마치 좀비처럼 생각 없이 의례적인 행동만을 하게 된다. 집단에 속해 있기 위해 집단 행위를 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쫓겨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겁에 질린다. 그 공포를 이유로 자신들의 행동이 불러올 개인적 집단적 비용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집단 착각은 심지어 우리가 단결해 있을 때조차 내부의 갈등을 도드라져 보이게 만든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를 가려버린다. 집단 착각은 서로를 향한 공포를 부추기며, 협동 능력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고, 사회적 진보를 가로막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감을 잃었을 때, 스스로 무력한 존재라는 어둡고 위험한 감정에 멍들어 있을 때, 위기에 빠진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진실은 우리가 전혀 힘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착각에 빠져 있는지 알았으니 다음 단계는 더 중요했다.

 

인간의 자발성이란 어떤 집단에게도 가장 강력한 자원이라는 믿음을 깔고 있는 것이다.

 

집단 착각을 분쇄하는 일에는 여러분도 나도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처럼,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변화를 만들어내야 할 책임이 있다.

 

"왜?" 혹은 "왜 안돼?"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민감하지만 중요한 대화의 물꼬를 트자. 스스로 전제하고 있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 본인의 전제가 틀렸을 가능성을 회피하려 들지 말자. 반드시 믿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낯선 이들을 신뢰하도록 하자.

 

진실을 말해보자.

 

 
집단 착각
최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를 보면, 대중의 심리를 이용해 자신의 쾌락과 권력,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선동가가 등장한다. 이전에도 우리는 913명의 사망자를 낸 존스타운 집단 자살 사건 등 극단적 집단사고를 통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사례를 접할 수 있었다. 분명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결정인데도 왜 우리는 다수의 선택을 따라 이런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걸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평균의 종말》 《다크호스》의 저자이자 하버드 교육대학원의 교수, 교육신경과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잘 알려진 토드 로즈는 이 질문에 간단한 해답을 내놓는다. 바로 인간의 본능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은 다른 이의 생각과 시선에 따라 행태를 바꾼다. 당신이 실제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다수가 좋다고 하면 괜찮은 듯한 착각이 들거나,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떠올려보라. 다른 이들과 행동을 조율하고 싶은 충동, 사회학자들이 흔히 ‘순응 편향Conformity Bias’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속감을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침묵하고 방관하는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집단 착각Collective Illusion’이라고 명명했다. 인터넷이 발명되고 SNS가 사람들의 일상을 담아내는 그릇 역할을 하면서 세상은 수많은 선동가가 판을 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두 진영으로 갈리어 극한 대립을 하는 정치, 양극화된 경제, 각자의 우물 속에서 자기 귀에만 메아리치도록 소리 지르는 문화적 고립의 시대를 살게 되었다. 한국 사회는 오래도록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타인의 시선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최근에는 스마트폰과 SNS의 발달로 인해 끝없는 '동료 압박Peer pressure’에 시달린다. 집단 착각에 휘둘리기 딱 좋은 여건을 스스로 만들며 살아가는 셈이다. 사회적 본능이 생물학적인 것이지만, 본능에 대한 대응은 우리 스스로가 통제할 수 있다. 이 책의 목적은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집단에 순응하는지, 그러한 순응이 어떻게 집단 착각을 낳는지 이해하고, 사회적 영향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완전히 파악하여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맹목적인 순응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갈 뿐 아니라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우리의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책을 통해 독자 여러분은 우리를 집단 착각으로 이끄는 순응의 함정에서 한 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나은 선택을 위해, 보다 나은 인간관계를 위해,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이 책은 당신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저자
토드 로즈
출판
21세기북스
출판일
202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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